Wednesday, January 29, 2014

문학 번역

번역자는 어떤 특정 문맥과 ‘울림’ resonance 가운데 텍스트의 언어를 대한다. 텍스트의 저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나 생존해 있더라도 창작의 생명력이 다한 저자일지 모른다.

수많은 원작 독자들이 그/녀의 작품을 읽는다. 똑같은 작품을 두고 독자마다 천차만별로 읽는다. 원작 독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는 그래도 최소한의 공통점이 있다.


문학 번역자는 독해와 리서치와 창의성에 근거하여 다른 언어로 새로운 본을 뜬다. 이 새로운 창작은 다시 천차만별로 읽히고 해석되면서 저자와 번역자의 의도를 벗어난다.


그렇더라도 어쨌든 번역 작품은 번역자가 내린 수많은 결정과 선택, 그리고 창조적인 노동의 결실이다.

Sunday, May 31, 2009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돌차기 놀이 (Hopscotch)>는 내가 (45세 때에) 번역에 첫발을 디디게 한 책이었고 이 번역으로 나는 '내셔널 북 어워드'를 수상했으며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번역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내가 그의 책을 번역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때 나는 미구엘 안젤 아스투리아스의 “바나나 3부작”으로 짬이 없었다. 코르타사르는 가보[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애칭]에게 기다리라고 했고, 그는 기다렸으며, 이 일과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못 만족해했다.

그렇게 해서 <돌차기 놀이>는 내게 있어서, 水路學적인 상투적 표현으로,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이 방향을 바꾸어 그 길을 따른 까닭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없었지만 몇 페이지를 훑어보았고 샘플로서 제일 첫 챕터와 뒷부분의 한 챕터 (어떤 챕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두 챕터를 번역했다. 편집자인 사라 블랙번과 훌리오, 두 사람 모두 내 번역을 좋아했고 나는 그 길로 바로 번역에 착수했다.

나와 훌리오가 이 소설에 끌렸던 것은 재즈, 유머, 자유진보주의적인 정치관, 창의적인 예술과 문학 등 그와 내가 공유했던 다채로운 관심사 때문이었다. 내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번역을 하면서야 비로소 이 소설을 완독했다.

이 특이하고 일반적이지 않은 절차는 어찌된 것인지 이 책 자체의 특징과 부합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어떤 점에서도 번역에 지장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것이 성공적인 번역에 키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코르타사르는 그의 책을 세 편으로 나누었다. 저 쪽으로부터, “이 쪽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쪽으로부터”로 나뉘는데 마지막 편은 “없어도 좋은 챕터들”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는 이 소설이 여러 권의 책으로 - 무엇보다 우선 두 권으로 - 구성되어 있다고 하며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안내를 해준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가되 제2편의 끝까지 읽고 나서는 멈추고 제3편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안내한 다음 그는 세 편의 각 챕터들을 다른 순서로 뒤섞어 배열한 안내표를 제시하여 다르게도 읽을 수 있도록 한다. 각 챕터마다 그 끝에는 다음에 읽을 챕터의 번호가 붙어 있는 방식이다. 하지만 제일 마지막 챕터인 131번 챕터는 58번 챕터로 가라고 하는데, 이 챕터는 바로 전에 읽었던 챕터이며 131번 챕터로 가라고 한다.

이 구도는 결국 튀는 음반의 효과를 낸다. 바늘은 계속 뒤로 도로 튀고 또 이것이 반복되면서 노래는 끝나지 않는 것이다. 이 방식에 따라 읽으면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을 처음으로 대하며 정식으로 - 표면적으로는 - 읽을 경우에는 “....... 자신을 놓아 버리고, 팍, 그리고 끝.”이라는 말로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창밖으로 몸을 던졌음을 암시하면서 소설은 끝나는 것 같다.

한 완고한 평론가는 그 소설을 두 번 읽도록 종용되는 것에 분노를 표했다. 훌리오는 내게 편지를 해서 그 가련한 얼간이는 자기가 우롱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에 수사학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사람들에게 그가 쓴 소설을 두 번씩은커녕 한 번이라도 읽어 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라면서 절대로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번역을 완료했을 때 나는 이 책 처음의 설명이 생각났으며 내가 단순히 이 책의 첫 페이지부터 제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거침없이 헤치고 나옴으로써 이 소설의 세 번째 독법을 제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둔한 평론가가 깨닫지 못한 것은 <돌차기 놀이>가 하나의 게임이며 플레이할 그 무엇이었다는 것이다. 훌리오가 책의 서두에 대략 제시한 설명은 두말할 것 없이 아르헨티나에서 그 놀이를 노는 방식이다.

‘땅’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에서 시작하여 숫자를 따라가다가 ‘하늘’이라고 명명한 네모 칸까지 가는 놀이이다. 훌리오의 작품을 처녀 출판해준 동향인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그의 지적인 장난기를 알아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들의 가난하고 문제가 많고 종종 음울한 출생지의 역사가 좀더 그들과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코르타사르는 또한 인류는 잘못 명명되었으며 호모 루덴스로 명명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돌차기 놀이>의 번역에서 낱말을 따라가는 나의 직관적인 방법이 아주 유용했다. 여러 가지 다채로운 챕터들에 담겨 있는 흐름을 내가 그럭저럭 잡아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훌리오는 항상 각 작중 인물마다 다른 대화와 독백 방식을 부여했다.

그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때와 혼잣말을 할 때 각각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음을 깊이 예리하게 인식했다. 어떤 원시적인 사회에서는 그러한 불일치를 완전히 다른 어휘로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어미의 격 변화로 처리했다.

코르타사르를 읽을 때 독자는 그가 그런 기교를 부리는 경향이 있음을 재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어떤 챕터에서는 간혹 그의 화자이기도 하고 분신이기도 한 올리베이라로 하여금 그가 라 마가의 방에서 집어 든 책 한 권을 보게 한다.

첫 번째 줄은 이상하게도 이야기의 줄거리가 되는 시대와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줄, “그리고 그녀가 읽는 것들은, 서투른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코르타사르가 주인공 올리베이라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가 작중에서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한 줄씩 번갈아 가면서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올리베이라가 사용하는 말이 갈도스의 말에, 또 그 역으로도,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다뤄야했다.

이 혼합은 여러 번 유네스코의 공문서와 같은 것들이 포함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코르타사르는 유네스코에서 번역가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이 사실 때문에 번역에 정통한 사람의 면밀한 검사에 놓이게 된다는 불안감으로 떨기보다 나는 오히려 내가 어떤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 있는지 훌리오도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미상불 그는 경우에 따라서 오직 번역가만이 해줄 수 있는 제안을 해주곤 했다. 따라서 그가 소설에 양념으로 사용한 공문서 부분의 번역에 이르렀을 때, 나도 그가 먹고 살기 위해서 했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되었다. 즉, 보고서들을 충실하게 번역하되 그것들이 서로 좀 일치되도록 손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며 번역을 한 것이다.

<돌차기 놀이>의 첫 부분과 “없어도 좋은 챕터들”의 일부분,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서술 에서 불어가 상당히 많이 엮어져 있다. 이 부분의 불어를 영어로 번역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훌리오가 그 부분들이 영어로 번역되기를 원했다면 소설을 쓸 때 처음부터 그 부분들을 불어가 아닌 서반아어로 썼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한 영어권 독자들을 위하여 그 책을 쉽게 씀으로써 그들을 모욕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나는 어떤 경우에는 다른 여러 이유 때문에 서반아어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표기했다. 다른 노래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탱고는 오리지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심각한 - 때로는 정말 웃기는 - 손상이 가해지기도 한다. 오페라 애호가인 나의 아버지가 오리지널인 이탈리아어 대신 영어로 바꾸어 부른 어떤 공연에서 들은 어떤 敍唱 부분을 인용하면서 오페라 번역이라는 어리석음을 놓고 조용히 웃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 . .)

나의 첫 번역이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작품이었으며, 이것을 번역하게 됨으로써 나는 그 다음에 번역하게 될 다른 작품들을 번역하기에 적절한 마음가짐과 방식에 연동하게 되었다. (. . .) 하이드 씨가 지킬 박사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닮아가기 시작했지만 그림자만을 투영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차원의 언어로 움직였기 때문에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훌리오보다 먼저 <돌차기 놀이>를 생각하게 되었어도 그 작품을 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훌리오가 승인하고 좋아한 영어 번역으로 그 작품을 살려냈다.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인생을 살아오며 낱말들이 시들어가고 또 다시 희미하게 빛을 발하면서 새로운 의미와 뉘앙스를 띠게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래의 언젠가 다른 누가 내 뒤를 밟으며 훌리오의 작품을 다시 번역해낼까 하는 자문을 해본다. 이 일은 끝없이 계속 진행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이란 절대로 완료되는 법이 없는 야릇한 점진적이고 진행형적인 문예상의 장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Trans. Gene

Monday, March 30, 2009

Text (1)

의도적으로 비非텍스트non-text를 창작에 사용하는 시인이나 산문 작가들의 작품은 차치하고, 실제 생활에서 비텍스트에 가장 근접한 것은 어린아이의 말과 좋지 않은 번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 Halliday and Hasan in Mona Baker, In Other Words (Routeledge, 1992), p. 111
Trans. Gene

Monday, March 16, 2009

문예 번역 (8)

번역을 수용하는 문화에 응하기 위해 번역을 수정하는 의식적 수정 결정이 뒤따를 수 있다. 이것은 편집자와 번역자의 공동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원작 내용의 일부를 빼는 수도 있다.

많은 출판사들이 원작 언어를 아는 편집자를 고용하지 않는 것도 지적해둘 만하다. 원작의 영향을 받지 않고 편집에 임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번역은 상당한 창의력을 요하는 노력의 결실이다. 번역자는 번역이라는 내성적 활동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서로 얽힌 사회적, 문화적 요소와 관련하여 그 어떤 제약이 있더라도 기존 문학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많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결국 문예 번역자인 것이다. (피터 부시)

- 이상 Routledge Encyclopedia of Translation Studies (2008: 127-130) 에서 추려 번역함.

__________________

Sunday, March 15, 2009

문예 번역 (7)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다른 번역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단시短詩를 번역할 때와 장편 소설을 번역할 때의 접근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소설을 번역할 때는 수 백 페이지에 이를 수 있는 작품의 전개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다른 운율, 비유, 상징을 다루어야 한다. 다독과 리서치를 통해 그런 것들의 유형을 식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창의적으로 고쳐 쓰는 과정에 예속되어 잠재의식에 의해 번역에 반영되기도 한다.

모호한 표현과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말로 가득한 제임스 조이스의 촘촘한 텍스트를 번역할 때는 조이스가 자국의 표준 언어와 기존 관념을 뒤흔들었듯이 번역어의 문화를 뒤흔들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문예 번역은 사회와 문화에 얽힌 작업이며 번역자는 상이한 두 문화의 중간에 위치하며 이곳에서 발생하는 복잡한 상호 작용에 열쇠의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는 벤야민의 말이 설득력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



Saturday, March 14, 2009

문예 번역 (6)

텍스트를 세심하게 읽고 또 읽으면서 해당 텍스트에 대한 리서치와 저자의 다른 작품에 대한 리서치를 하는 것은 번역에 필수적인 준비 작업이다. 저자가 사는 나라에 가보는 것도 있을 수 있겠고, 그 나라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리서치도 있을 수 있다 [-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특히 한국의 경우, 비현실적일 것이다.]

자국의 저자가 쓴 책 가운데 그와 비슷한 책이 있으면 참고로 읽어보는 것도 좋다. 번역가 펠스티너의 경우,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번역하는 데에 적절한 ‘목소리’를 가늠하기 위해 T. S. 엘리엇의 시를 읽었다.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어느 기사에선가 읽었는데, 전문 번역가 정영목 씨가 한국 문학 작품을 읽어 한글 표현력을 키운다고 했던 것 같다.]

생존해 있는 저자의 작품을 번역할 경우, 저자와 번역자가 협력해서 번역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다. 어떤 저자들은 기꺼이 번역에 적극 관여하기도 하는데 그럴 경우 번역의 결과는 원작과 다른 새로운 작품이 되기도 한다. 원작에 새로운 것이 보태지는 것이다. 한편 어떤 저자들은 번역 텍스트에 코멘트를 하는 정도에 그친다.

또 한편 번역자 편에서 원저자의 관여에 일정한 선을 긋기도 한다. 원작에 너무 단단히 얽매이지 않는 번역을 추구하기 위함이다. 이런 방식은 번역자의 재량에 폭을 더해준다(Venuti). 번역할 작품에 대한 학문적인 리서치를 안 하기로 결정하는 번역자들도 있다. 좀더 창의적이고 직관적인 번역을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번역 방법을 선택하든지 번역은 기본적으로 다독과 개고의 결과다. 다독과 개고는 최종 원고의 모양을 결정한다. 배경은 매우 중요하다. 번역, 출간의 전반적인 과정은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끊기거나 변경될 수 있다. 어떤 책의 출간일은 영화의 개봉에 맞춰야 할 것이고 [또 어떤 책은] 경제나 정치 상황에 민감하게 조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Wednesday, March 11, 2009

문예 번역 (4)

(내가 완전히 전업 번역자가 아닌데 이런 글을 계속하려니 다소 낯간지럽다. 그러나 어쨌든 번역은 멋진 일이며, 심지어는 예술의 묘미마저 느낄 수 있는 분야임을 알기 때문에 기왕 하는 것 깊게 파고 싶은 마음이다. 번역이 순수한 창작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독서에 있다. 번역은 정밀 독서의 정화다. 결정체다. 다른 작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번역의 가장 큰 매력이다. 이러한 측면 말고도 학문적인 측면에서 아직 개간해야 할 곳이 많으므로 또한 매력적이지만 여기에 모든 시간을 쏟을 수 없는 나로서는 좀 아쉬울 따름이다. 아무튼 이 블로그는 그냥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Motivation, 그렇다. 번역을 계속해야 하고 또 이런 블로그를 계속해야지, 동기 부여를 찾아야 한다. 어디서 찾지?)

나라별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 다를 것이다. 프랑스의 출판사 Actes-Sud 의 한 자회사는 일단의 문예 번역자들이 운영하며 번역서를 선정하고 외부 번역자에게 번역을 의뢰하는 일을 총괄적으로 관장한다. 또한 외부 평가자들을 두고 번역 고려 대상 도서들에 대한 소견서를 의뢰하고 수집한다. 영국과 미국의 경우, 출판사들은 대개 프리랜스 번역자들에게 번역을 의뢰한다. 이 번역자들은 출판사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아는 사람을 통해 (누구의 친구가 번역을 하는데 괜찮게 한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개를 받아 일을 맡기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작품을 보고, 혹은 번역자 인명부를 찾아 의뢰를 한다.

번역자마다 번역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같은 번역자라도 번역하는 작품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현존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하든 기존 번역본을 디딤돌로 삼아 고전을 재번역하든 번역자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단계와 문제점들이 있다. 과거에는 번역자들이 이런 단계와 문제점들에 대한 글을 쓰지 않았다고 조지 스타이너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제는 번역자들이 그런 점들에 대한 많은 사례 연구를 남기고 있다.

(한국의 번역자들도 사례를 글로 남기는 일에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특히 번역 역사가 일천하고 지반이 약한 한국의 번역을 볼 때, 기록을 남기는 일에 정말 열심을 부려야 할 것이다. 그저 일반적인 이론서만 대충 어디서 뱉기거나 짜깁기해서 내지 말고, 직접 번역해가며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인 사례로 많이 남기고 후학들이 이것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의 문학 번역서들을 보면―인문서 번역도 그렇지만―S대 영어 박사라고 혹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교편을 잡고 번역한다는 사람들의 번역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번역이 무성하다. 학생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기 위해 대신 하게 한 것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인문서의 경우는 내용의 효과적인 전달 내지는 작가의 문체 논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문법과 어의 등 기초적인 문제에 대한 오역 시비나 거론되고 있느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